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라크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시작과 종전(2003. 3. 20~4. 9): 너무나 쉬웠던 작전 === [[파일:attachment/EarlyIraqWarComic.jpg]] > 빈사상태의 전갈(이라크 게릴라들)이 독수리(미군)에게: " '''항복…아직…안했냐?''' "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확대해석하여 이라크 침공을 준비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인 2002년부터 이미 CIA와 군정보부대의 정찰조를 이라크에 잠입시켜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사전정찰은 물론 [[이라크군]]의 주요 지휘관들을 포섭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후세인 정권에서 탄압받고 있던 [[쿠르드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을 부추겨서 침공시에 미군을 돕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폈다. || [[파일:Bush_auth_jbc.jpg]] || ||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을 허가하는 법안을 소개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 2002년 9월 11일, 9·11 1주기를 맞아 부시 대통령은 추도식 후 특별담화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침공 계획을 발표했다. 9·11 이후 아프간 전쟁을 일으켜 탈레반을 일시적으로 붕괴시킨 이후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라크 침공 계획은 이미 많이 예상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미국은 2002년 이미 후세인 정권 심장부에까지 공작원을 심어두고 감시할 정도로 이라크 내 정세를 긴밀히 살폈고, 이를 통해 침공계획과 무력사용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정당화 여부 등을 꾸준히 계획, 논의하다가 9·11 1주기 때 직접적인 침공 계획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참고로 피격당했던 펜타곤도 보수를 마치고 이날 재개장했다. 2002년 10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고조되던 순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들고나온다. 결국 이 논란이 많은 법안은 미 의회로 넘어갔고 이 때 미 정치인들의 찬성/반대 여부는 아직까지도 회자되기도 한다. [[힐러리 클린턴]]과 [[조 바이든]] 모두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다는 사실로 공격을 많이 받았다. 2002년 10월 2일 법안이 [[미국 하원|하원]]에 넘어갔고 '''찬성 293표 반대 133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된다. [[공화당(미국)|공화당]]에서는 6명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중 한명이 [[리버테리안]]의 대부인 '''[[론 폴]]'''. 당시 무소속 의원이던 '''[[버니 샌더스]]'''또한 반대표를 던졌다. 민주당에서는 찬성 81표, 반대 126표로 반대가 조금 더 많았다. 2002년 10월 11일 [[미국 상원|상원]]에서도 표결이 이루어졌는데 '''찬성 77표 반대 23표'''라는 큰 표차이로 다시 한번 가결되어 부시의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 계획은 의회의 승인까지 받게된다. 민주당에서는 찬성 29표 반대 21표였고 공화당은 찬성 48표 반대 1표였다.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은 로드 아일랜드 상원의원이었던 '''링컨 채이피'''. 이 사람도 [[론 폴]]과 같은 [[리버테리안]]이다. 당시 찬성했던 민주당 의원으로는 '''[[조 바이든]],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척 슈머]]''' 등이 있었고 반대했던 의원으로는 [[딕 더빈]]등이 있었다. 조 바이든과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등은 훗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이 법안을 찬성했다는 이유로 [[버락 오바마]] 등 경쟁 정치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버락 오바마]]는 '''2004년 중간선거'''에서야 처음으로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이 당시에는 일리노이 주의회 상원의원이었으므로 이라크전 개전책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자유롭다.] || [[파일:Colin_Powell_anthrax_vial._5_Feb_2003_at_the_UN.jpg]] || || '''[[UN]]에서 이라크의 탄저균 모델을 들어보이며 발언하는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 ''' || 2003년 2월 5일 [[콜린 파월]] 장관은 [[이라크]]가 [[탄저균]]을 무기화하고 있다며 유엔에서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피력하였으나 이후에 이라크의 탄저균 무기화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파월의 발언 이후 '''미국, 영국, 폴란드, 이탈리아, 호주, 덴마크, 일본, 스페인'''은 미국의 무력 사용을 허가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으나 러시아와 [[NATO]] 회원국이던 '''캐나다, 프랑스, 독일'''은 반대표를 던졌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의 결의안을 폐기했다. '''많은 중동 전문가들이 이미 후세인 체제 전복은 [[다에쉬|헬게이트]]를 열 것이라고 여러번 경고를 했다'''. 그러나 미국의 [[네오콘]], 그리고 [[공화당(미국)]]의 지지기반 중 하나인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 세력은 노골적으로 전쟁을 부추겼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팻 로버트슨]]을 선두로 미국의 극우 목사들이 줄줄이 나서 중동의 복음화를 위해 부시 대통령에게 힘을 줘야한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다. 물론 이슬람권의 반발 때문에 바로 말을 돌렸지만, 미국 내부적으로는 극우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라크내 기독교인들은 후세인 정권 시절에는 시아파나 쿠르드인들과는 다르게 정권에 반기를 들지 않는 이상 사회적으로 꽤나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한 이후로 치안악화로 테러리스트들이 설치게 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납치와 살인이 늘어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이라크를 떠난 기독교인들이 많다. 특히 이라크 서북부가 IS의 점령지로써 고초를 당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지 W. 부시에게 뒤통수를 맞아도 엄청 세게 맞은 꼴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라크내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욕하고 후세인 시절을 절실히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즉, 기독교 신도수를 늘리기는 커녕 오히려 반으로 깎아먹었으니 대 실패한 작전이라는 것. 당시 미국 내 여론에서는 이라크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이 시기 미국인들을 비통하게 했던 [[STS-107]]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사고를 두고 [[고인드립]]을 쳤던 것. STS-107의 승무원 중 이스라엘 공군 대령이자 과거 이라크 오시라크 원전 공습을 수행했던 파일럿인 일란 라몬 대령이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에서는 잘 뒈졌구나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쳐서 전세계의 공분을 샀다. 이스라엘이랑 계속 싸우던 이집트 같은 나라들도 이스라엘에 위로 메시지를 전한 판에. [youtube(WdTrSm-FIfo)] 2003년 3월 18일, [[미국]]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에게 조건부 개전선언이 포함된(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 군사작전 돌입)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이라크는 이를 간단히 씹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kruFM22q5us)]}}} || || '''후세인은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라''' ||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 현지시각 오전 5시 34분에 미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침공군 총사령관은 [[미합중국 육군|미 육군]][[대장(계급)|대장]] [[https://en.m.wikipedia.org/wiki/Tommy_Franks|토미 프랭크스]] [[장군]]이었다. 이 사람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장군 중 1명으로 꼽힌 장군이다.[* 미국 보수성향 국제 전문지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가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장군들 5명에 호레이쇼 게이츠, 조지 메클렐런, 로이드 프레덴델, [[더글라스 맥아더]]와 함께 선정되었다. 어느 정도는 판별해서 듣는 것을 추천한다.] 작전명은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 Freedom) 총 침공군의 수는 [[미군]] 240,000명, [[영국군]] 45,000명, [[호주군|오스트레일리아군]] 2,000명, [[폴란드군]] 194명으로 어림잡아 합계 약 300,000명, 정확히는 287,194명 이다. 이들은 공습 뒤에 북부 쿠르드지역과 남부 쿠웨이트로부터 동시에 침공했다. 여기에 쿠르드 지역군 70,000명이 가세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9px-AirForce_over_Iraq.jpg|width=100%]] || || [[이라크]]의 영공을 비행하는 [[미국]]·[[영국]] 연합군의 군용기. 맨 위의 항공기가 영국 공군 소속 파나비아 토네이도이다.|| 이렇게 보면 정당한 [[선전포고]]가 없었던 것으로도 보이지만, 부시의 최후통첩에 조건부 개전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 군사작전 돌입). 이건 최후통첩과 선전포고를 동시에 한 것이다. 보통 최후통첩을 적국에 전달하고 출병 직전 개전선언을 하는 것이 원칙이나, 부시는 조건부 개전선언을 넣은 것으로 이러한 부분을 처리했다. 물론 애당초 선전포고가 있었건 없었건 명분 자체가 없는 전쟁이라서 의미는 없다. 거기다 침공 직전에는 사담 후세인의 자진퇴진여부와 상관없이 군사작전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사실상 후세인 퇴진이라는 침공명분은 허구였음이 입증되었다. || [youtube(7CAwx0ZX_uM)] || [youtube(SHEJ8Up0mQ8)] || || 바그다드를 강타하는 미군 순항미사일들 || 전황을 나타낸 영상 || [[이라크군]]과 민병대는 산발적 저항을 하기는 했으나 막강한 미군 및 동맹군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남부 지역에서의 전투는 패배를 거듭했고, 4월에 이르러 사막의 모래 폭풍으로 미군의 진격이 잠시 묶인 틈을 타 공화국수비대를 투입해 공세를 벌였다. 공화국수비대가 그나마 이라크군 내에서 정규군이라 할 법한 유일한 병력이었고 이후 저항세력의 주축도 공화국수비대였다. 하지망 전면 대결에 나섰어도 미군에게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이라크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강성하던 걸프전 시절에도 탈탈 털렸던 이라크군이었고, 이라크전 때에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 미군은 항공전력을 동원한 대규모 [[융단폭격]]으로 대응하고, 하필 전면 충돌 직전에 모래바람이 걷히는 바람에 결국 붕괴되고 남은 병력은 중장비를 버린 채 퇴각. 물론 역으로 그 덕택에 대부분의 병력이 건재한 상태로 전장을 이탈하여 후일 후세인 일파 소속의 저항군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외 사담 후세인의 저항도 상당했지만 역시 미군에게 끈질긴 저항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강요하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다만 이들의 준동으로 후방 지역에서의 미군의 피해가 상당했고, 역시 전쟁 이후에도 대부분이 살아남아 저항세력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에도 진격이 계속되어 침공 2주만인 4월 9일에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했다. 4월 30일까지의 [[이라크군]]의 전사자는 9,200명, 민간인 사망자는 7,299명, 그리고 [[미군]]은 139명, [[영국군]]은 33명이 전사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George_W_Bush_on_the_deck_of_the_USS_Abraham_Lincoln.jpg]] || || 2003년 5월 1일, 링컨 함에 내려 --[[텔레토비]] 닮은-- 영송병들의 환영을 받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 2003년 5월 1일, [[조지 W. 부시|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부시]]는 [[미 해군]] [[해군 항공대|항공대]]의 [[함재기]]인 [[S-3]] [[바이킹]] [[대잠초계기]]를 타고 산디아고에 정박중이던 [[니미츠급 항공모함|USS 에이브러햄 링컨 함]]에 착함, 후세인 정권 붕괴와 종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부시는 자신이 이라크의 평화를 가져왔다면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 사진을 홍보에 썼다. 그러나 정작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축구 아니었다면 우린 저항군 들어가서 미군을 죽였을 것이라는 증오어린 반응을 보였다. 우선 [[미군]]의 전쟁수행 자체는 굉장히 우수했다. 걸프전도 그랬지만 각각 공화국 수비대의 격멸(걸프전)과 바그다드 점령(이라크전)이라는 목표를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완수하였다. 걸프전과 마찬가지로 군 전체 병력은 25만 이상의 대규모였지만 대부분이 비전투부대 및 이를 호위하는 병력으로 실제 전선에 적극 투입된 건 2~3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미군은 이런 소수의 전투병력으로 강력한 항공지원 아래 [[기동전]]을 펼쳐 이라크군을 연파, 단숨에 이라크의 전쟁수행 능력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렇게 깔끔하게 보이는 전과는 사실 [[이라크군]]이 경제난으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100만 명의 병력의 군사력이라고 평가되던 이라크군은 1991년 [[걸프전]] 당시 주력부대가 거의 다 소멸되고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대폭 감축된 상태였다. 2003년 개전 직전에는 병력은 30만 명 안팎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그나마 제대로 굴러가는 부대는 수만 명의 공화국 수비대 정도고 기타부대들은 동원마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라크는 199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금수조치 때문에 [[전차]] 같은 중화기는 거의 없었고 작전가능 항공기는 50여 대 이하였기에, 아예 공중전을 포기하고 일부 항공기는 사막에 [[매장]]해 은닉했다. 이 항공기들은 당시 미 해군 네이비 씰 3팀이 작전 중 발견했다. 이렇다 할 중장비마저 없었으니 공략의 난이도는 걸프전 때보다 현저히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가 전쟁 직전에 서방의 평화운동가들과 개전 반대 정치인들을 대거 자기네 돈으로 초청해서 자국의 이런 막장 상황을 견학시켜주면서 국제사회에 개전을 저지해 달라고 애처로울 정도로 애걸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때 미국의 영화배우 [[숀 펜]]도 3일간 바그다드를 방문해서 열악한 병원시설들을 돌아봤다. 숀 펜은 바그다드 방문전에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 전쟁반대 광고를 싣기도 했다. 그리고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수도인 바그다드 함락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기세등등한 태도로 나오며 이라크 군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하라고 메세지를 던졌지만, 미군이 바그다드까지 치고 올라오자 급히 피난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의 은신처에 숨어 기거했다. 그러던 2003년 12월,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2년간의 전범재판을 거쳐 2006년 말 사형당했다. 그런데 이후 사담 후세인을 재판하고 사형에 처한 주체는 미국이나 미군이 아닌 이라크 민간 정부다. 미국은 오히려 사담 후세인의 처형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라크 정부가 씹고 얼른 처형해 버린 것. 사담 후세인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과 [[쿠사이 후세인]]은 미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너무 쉽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어쨌든 단 2주만에 후세인 정부가 무너지면서, 이라크 전쟁도 끝나는 줄 알았고, 이라크에도 평화가 올 줄 알았다. 그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